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즈번드 킴멜 (문단 편집) === 진주만과 그 이후 === 역사에 그의 이름을 길이길이 남기게 된 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 공습]]으로 사실상 그의 커리어는 끝났다. 공습 와중에 킴멜도 일본기가 발사한 총탄에 맞았지만, 직격이 아닌 바닥에 맞고 튀어 유리창을 깨트리고 날아온 [[도비탄]]이었기에 다치지는 않았다. 킴멜은 씁쓸하게 '''차라리 이 총탄에 죽었더라면 좋았으련만...'''이라고 되새겼다고 한다. 킴멜은 자신의 운명을 알았지만, 공식 인사가 내려지기 전까지는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엔터프라이즈를 이끄는 홀시에게 일본 함대 수색 명령을 내린 것을 시작으로, [[웨이크섬 전투]]에 증원을 보내는 함대를 파견했다가, 다시 이 증원함대를 위기에 빠트릴 수 없다며 회항명령을 내리는 결단을 내렸다. 이는 웨이크섬의 해병 수비대를 버린다는 가혹한 결정이었기에 여론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는데, 킴멜은 이미 진주만 기습을 허용한 최고책임자로서 맹비난을 받고 있었으므로 추가적인 비난에 개의치 않았다. 사실 증원을 준비한 함대 지휘관들도 '가슴으론 반발심이 생기지만 머리로는 이해하는' 상황이었고 킴멜의 후임인 니미츠 제독도 이를 지지했으며, 심지어 웨이크섬의 현장 지휘관이며, 웨이크 함락 이후 종전까지 포로 생활을 한 제임스 데버루 해병대 소령도 전후 인터뷰 등에서 웨이크섬 포기를 납득하고 이를 이해하였다고 밝혔다.[* 히틀러가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지킬 수 있는 건 지키는 것이 아닌 무조건적인 방어와 공격 양극단을 오고가다 철저히 패망한 것과는 상당히 비교되는 부분이다.] 이후, 12월 31일부로 정식적으로 사령관직에서 경질되면서 다시 소장이 되었고, 후임자 [[체스터 니미츠]]에게 직을 인계했다. 그 뒤 계급정년에 걸려 자동퇴역하게 되었다. 이후 진주만에서의 전격적인 기습을 당한 것을 조사하기 위해 구성된 의회 조사단에서 킴멜은 기습을 사전에 인지할만한 정보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다고 변호했으나 조사단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은거하며 남은 여생을 보내다가 1968년 5월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